육섭 오해 2

B탑 2015. 8. 15. 10:35




“다들 알잖아. 성재가 나 싫어하는거.”


창섭이 한발 빼기 위한 진담반 농담반을 늘어놓자 은광이 빵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술기운으로 벽에 나른하게 기대어있던 민혁도 거들었다.


“무슨 소리긴. 쟤 지금 육성재랑 같이 답사 가기싫어서 수작부리는거잖아.”


은광이 민혁의 말을 듣고 다시금 창섭을 바라보니 도톰한 눈을 크게 접으며 능청맞게 웃는다.


“그게 아니라니깐.”


특유의 귀여운 말투는 곧잘 형들을 녹이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민혁도 은광도 양보할 수 없었다. 지난번 엠티답사를 같이 가기로 해놓고 펑크냈던 창섭의 과오가 한몫했음이 분명하다.


“쨌든 성재하곤 얘기 끝났으니까 최대한 빨리 갔다와.”


민혁이 룸에 도착한 피처병을 받아들며 창섭에게 피하지 못할 직구를 날렸다.


“걜 도대체 어떻게 꼬드겼대?”


그 야생마 같은걸. 덧붙여 묻는 창섭의 하이톤이 몹시도 궁금함을 담고있었지만 민혁은 그저 포개져있던 잔을 해체시키며 대수롭잖은 말을 남길 뿐였다.


“그냥. 술먹다가.”

“술먹다가?”

“나한테 약점 잡힌거 하나 있었거든.”

“약점?”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재 얘기에 유독 토끼처럼 호기심어린 태도인 창섭은, 괜히 순순하게 정답을 알려주기 싫게끔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성재도, 아마. 민혁이 거기까지 생각하다 머릴 털었다. 은광이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 거리다 내려놓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래 창섭아. 애들 기말도 거의 다 끝났고, 더 오래끌다간 집에 내려가느라 여행 못갈 애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아오…. 내가 진짜 걔랑….”


불과 2주전에도 술김에 성재네 집에서 하루 묵었다가 다음날 녹초가 되도록 붙들려 돌아다녔던 아찔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울렁이고 쓰라린 속을 붙잡고서 네 살씩이나 어린 육성재님 비위를 맞추느라 식은땀을 줄줄 흘렸었지 아마.


‘형. 나 팔아파 들어줘.’

‘니 가방을 왜 나한테 들래.’

‘안 들어줄거야?’

‘당연하지.’

‘그럼 이창섭 게이라고 소문내야지.’

‘아……야!’


어떤 필름을 되감는지 변화무쌍한 창섭의 표정을 눈동자만 도로록 굴려 쫓는 민혁이 있었다. 은광이 묵묵히 잔을 먼저 입에 가져다 대던 민혁에게 다가가 저지하며 말했다.


“빨리 갔다와. 알았지?”

“형 그럼 나 갈테니까 파트너만 바꿔주면 안돼?”


뒤이어 마주친 시선에 창섭이 간절함을 잔뜩 담아 물었지만,


“응. 안돼.”


단호한 대답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은광의 인자한 미소가 그날만큼 단단하고 보일 수가 없었다. 창섭이 시무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쭉 빼물었다.




오해




“너 어디야?”


묻는말에 대답은 하는 것 같은데 지글지글한 소음이 핸드폰 너머로 가득하다. 바람소린지, 물소린지 알 수없는 둔탁한 소리는 자꾸만 성재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창섭의 노력을 막았다.


“뭐라는지 안들려.”

‘나 못갈것 같다니까요 형.’

“뭐? 왜?”

‘진짜 큰일 났다고.’

“무슨 일인데.”

‘나 여자친구가 임신했대.’

“너 여자친구 없잖아.”

‘전 여자친구.’

“전 여자친구가 임신한걸 왜 전 남친이 신경쓰구있는데.”

‘날짜를 계산해보니깐 나인거 같더라고.’


창섭이 수화기를 붙든 손을 얼굴에서 조금 떼어낸뒤 인내심을 보충하는 의미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 맹랑한 어린이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걸까.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한숨을 내쉰뒤 대화를 이었다.


“뻥치지마 이 멍청한 오징어야.”

‘진짜라니까. 형도 아는애야. 게다가 나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통화할 시간도 없어요 형.’


한가롭다니. 한가롭다니! 내가 지금 이 더운날 땡볕아래서 후끈한 바람을 맞으며 배를타고 섬까지 날아가 민박집을 알아보게 생겼는데. 한가롭다니. 창섭은 뒤통수로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느끼며 성재가 방금 자못 심각하게 늘어놓은 말을 곱씹었다. 여전한 소음속 성재가 말을이었다.


‘접때 걔가 형보고 자기 엄마 닮았다고 했었잖아. 기억 안나?’

“…….”

‘그랬더니 형이 편하게 엄마라 부르라며.’

“니가 거친 여자가 한둘이어야지. 내가 본것만 해도 벌써….”

‘됐고 아무튼 나 오늘 못가요 형.’

“어쩔건데?”

‘지우라고 해야지.’

“뭐?”


지워? 커진 목소리가 창섭의 당황을 대변했다. 몇 번 깔깔 웃고 지나치던 평소의 일회성 농담조가 아닌 사뭇 진지한 성재의 목소리에 창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말려들고있었다. 성재의 어조를 따라 창섭의 목소리도 톤을 낮춰갔다.


“야. 육성….”

‘형. 미안해요 오늘은. 진짜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게.’

“성재야.”


창섭이 목을 가다듬으며 언어도 함께 순화하려는 시도를 거치는 와중 머리를 굴렸다. 얘라면. 그래, 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혈기왕성하고 호기롭고 패기넘치고 앞뒤 계산못하는 어린애니까. 진짜 그럴 수 있어. 저렇게 풀이 죽어가지고 불안불안한게 다그쳤다간 또 무슨 사고라도 칠지 모르니 잘 타일러보자. 더위에 지친 사고회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진실여부를 꼼꼼하게 가리는 과정을 지나친것이 큰 오점이 될줄, 창섭은 몰랐었다.


불신으로 똘똘뭉쳐 여간해서는 잘 속지않던 태도가 어느순간 바뀌었음을 눈치챈 성재는, 멀찌감치서 동그란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풀었다 하며 심적 갈등을 겪고있는 창섭을 숨죽여 지켜봤다. 물론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은 커다란 웃음소리를 삼키기 위해 입을 틀어막는것도 잊지 않았다. 재밌다. 나 이럴때보면 진짜 어렸을때 꿈꿨던 연예인 했어야 하는건데. 배우쪽으로 나갔으면 크게 성공할 재목이란 말이지. 회심의 미소를 품은 자뻑도 잊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이따가 전화해라.”

‘…….’

“여기는 형이 알아서 할게.”

‘고마워요 형. 진짜 미안해요 그리고.’


후다닥. 창섭의 말 끝자락을 듣자마자 서둘러 전화를 끊는 섬세한 스킬도 발휘했다. 통화가 끝난뒤 고개를 푹 숙이고 길게 한숨을 잡아빼는 창섭의 뒷모습을 구경하는일이 왜 이렇게 즐거운지는 육성재 자신도 모를일 이었다. 몇분 뒤 염색한지 얼마 되지않는 오렌지빛 머리칼이 통통 움직여 ktx에 올라탔다. 성재는 밖에서 서성이다 창섭이 자리를 잡고 방심한 틈을 타 출발 직전 다른칸에 착석했다.


본래는 고학번들의 동기모임이 될 뻔한 자리였는데, 같이 가고싶단 후배들이 여럿 생기면서 학생회인 은광이 추진하게된 여행이었다. 짧게 하루만 묵을 예정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길어졌다. 필히 사전답사가 필요하게된 상황이라 투입된 인력들이 하필 이 학과 최고의 또라이 두명이었단게 크나큰 함정이라면 함정 되시겠다.


뭘 하는지, 두어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창섭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성재가 뒤를 밟았다. 배를 타면서부터는 걸릴뻔 했던적이 한두번이 아녔으나, 답지않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고있는 허여멀건 얼굴이 하도 진지해 그만 장난을 깨고 들어갈 타이밍을 놓치고야 말았다. 창섭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물고 걸었다. 혼자서 터덜터덜 걷다 한눈을 팔다 아무 식당에서나 조촐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성재는 실컷 구경했다. 혼자있는 모습을 보는것도, 저렇게 장난기를 쏙 뺀 기복없는 모습을 보는일도 나름 생소하고 흥미로웠다. 계약할 곳을 몇군데 들러보고 나선 기운이 빠졌는지 커피캔을 들고서 부둣가에 걸터앉아 멍하니 바다구경을 하는 모습도 성재는 훔쳐보았다. 애초부터 늦은 출발덕에 어느덧, 해가 지고있었다. 둘이서 티격대고 왔더라면 장난치고 시비를 거느라 슥슥 금방 지나쳐 왔을지도 모를일. 시간이 꽤 흘러감에 따라 성재는 창섭에게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수화음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형.”

‘어. 뭐야, 너 어떻게 됐어? 친구는, 괜찮아?’


어쩐일인지 걱정을 실컷 묻히고 자신을 맞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성재는 반가웠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니가 누구긴. 멍청하게 그런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애아빠 되게 생길 몸이지.’

“그런거? 그런게 뭔데.”

‘너는…. 넌, 지금 이상황에서도 장난이 나오냐?’

“이상황이 왜. 뭐가 어때서. 형이 알아서 할테니 이따가 전화 하라며.”

‘…….’

“좋기만 하구만. 오랜만에 창섭이 형 제대로 낚아먹었더니 속이 다 시원하네.”

‘…….’

“형. 형형.”

‘…….’

“화났어요?”


어? 화났어? 헤헤 웃으며 특유의 약올림어조로 창섭을 자극하던 성재의 눈앞에, 오렌지 같은 뒤통수가 다시금 한숨을 푹 쉬어내는 모습이 들어왔다. 명치께에 얹은 손등이 유독 하얬다.


“화났냐고 묻잖아요.”


창섭의 등뒤까지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내자 움찔 한 실루엣이 천천히 뒤를 돌아 눈을 마주한다. 몇 번 눈동자를 굴려 성재의 행색을 훑던 창섭은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끝났는지 눈알을 뒤집을 것 처럼 화를 삭이는 표정을 했다. 성재는 창섭이 반격할 틈조차 주지않고 얄미운 표정으로 고갤 들이밀었다. 속았지 속았지! 꾸웩, 말아쥐고 있던 손으로 입술을 덮으며 구역질 흉내를 내던 창섭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걸 뭐라고 하루종일 걱정을, 걱정까지…. 아오…….”


걱정했어? 형 진짜 나 걱정했어? 꼭 개그맨 같은 얼굴로 눈은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비틀어 웃는 모습을 본 창섭의 머릿속은 단 한가지만으로 가득했다. 이걸 딱 한 대만 때려갚는다면 속이 시원하겠다.


“아무튼 너, 육성재. 내가 오늘치 고생한 값 진짜 다 받아낼거야.”


내려놓았던 백팩을 들춰메고 일어선 창섭이 말하자 성재또한 지지 않았다.


“무슨 값이요. 나도 이렇게 형이랑 똑같이 ktx타고, 배타고 와서 발품까지 다 팔았는데?”

“일은 내가 다 했잖아. 나혼자!”

“뭐가 혼자야. 혼자라고 느꼈을 뿐이지 난 항상 형 곁에 같이 있었다고요.”

“진짜 무슨 말이나 못하면. 넌 올라가서 보자 못생긴 육성재.”

“올라갈땐 안심심하게 해주면 되잖아요.”

“시끄러.”

“근데 다음 배는 언제 나가요?”

“어? 배?”

“응.”

“다음거?”

“어.”


성재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잇지 못한 창섭이 그제서야 멍한 얼굴로 눈과 입을 키운채 고갤 돌렸다. 창섭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성재도 덩달아 눈을 굴려 멀찌감치 위치한 선착장 끄트머리를 바라봤다. 빠르게 어두워져가는 바닷가, 수평선이 멀리서 고요히 넘실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속 불안해진 걸음이 빨라져 도로가로 뛰쳐나간다. 흩어진 앞머리를 털어내며 속도를 줄인 성재의 걸음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배의 꽁무니를 그려넣은채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 지고 있었다.







심심할때마다 쓰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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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떡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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