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섭 오해

B탑 2015. 7. 31. 00:54




“미안. 성재야.”

 

성재야. 몇 번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애타는 표정일지는 안봐도 뻔했다. 차라리 평소 그렇듯 뻔뻔하고 뺀질뺀질한 얼굴로 턱이나 처들고서 얘기했으면. 이게 뭐,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게 어? 뭐, 그렇게 창피한 일이야? 어? 어? 그래?

 

“성재야.”

 

이보다 더한일로도 훨씬 뻔뻔하게 굴었으면서. 마치 얼굴에 껍데기를 세개라도 쓴 것마냥 혓바닥까지 내밀고 약올리는데 능숙했으면서.

 

“야, 육성….”

 

고작, 이깟일이 뭐라고.

 

“뭐. 계속 그렇게 부르지만 말고 말을해 말을.”

 

성재가 뚱한 얼굴로 멈춰 돌아서 말하자, 뒤를 졸졸 쫓던 얼굴이 훅 가까이 끼쳐오다가 파다닥 놀라 두발짝만큼 달아난다. 몹쓸 죄를 지은것 처럼 두손까지 모아쥐고서 고개를 폭 처박고 있다. 파마기가 옅게 남아있는 갈색 머리끝이 한여름의 후끈한 바람결을 타고 가볍게 흩날린다.

 

“야…. 미안.”

“…….”

“미안. 진짜 형이,”

 

잠시간의 정적 끝에 돌아온 말이 맘에 들어차지 않는듯 팔짱을 끼고서 눈을 흘기던 성재가 다시 미련없이 돌아 걷는다. 덕분에 말이 끊긴 창섭은 다시 오도도 따라붙어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를 이용해 먹어서 미안하다. 형이 정말 면목이 없다 성재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이런 형의 모습을 보고서 스크래치가 그어지는 것은 어째서 제 마음이어야 하는가. 후. 널찍하게 벌어진 등판은 잠시간 걷다 분을 삭이는듯 멈춰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어깨너머가 그 날밤만큼 멀고도 높아보인 것은 창섭에게도 처음이었다. 다른 색의 오해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밤이었다. 창섭도, 끝내 돌아서지 않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똑같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해

 

 

 

그날밤 사건의 발단이고 나발이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성재가 입은 데미지라곤 0에 가까웠으니까. 충격에 가까울 만큼 사그라 들었던 형의 작은 모습이 짜증을 돋웠을 뿐이다. 약속이 있다며 평소보다 과하게 꾸미고 나가는 모습이 석연찮아 뒤를 밟았던게 실수였다. 건장한 이십오세 남아가 데이트를 좀 하겠다는데 이상할 건덕지가 있을 턱이 있나. 사과라는 건 오히려 그걸 미행이랍시고 몰래 뒤따랐던 제가 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창섭이 만난것은 준수하지만 꽤 느끼함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을줄 아는 남자였다. 평소처럼 게걸스레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기에 친한 친구겠거니 싶었는데, 그 버터남이 무려 이창섭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 약점하나 잡아 학기말이 될 때까지 제대로 한번 놀려볼까 하는 생각에 시작한일이 몸집커진 눈덩이가 되고 말았다.

 

근육질의 남자는 창섭을 꽤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사라진 육성재를 찾느라 안달이난 스마트폰 안의 호들갑은 이미 불도저같은 호기심에 파묻혀 존재감을 잃은지 오래였다. 남자는 으슥한 곳으로 창섭을 데려가 벽에 밀어넣고선 가랑이 사이로 제 무릎을 끼워넣었다. 더 우스운 것은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시원찮은 창섭의 꼴이었다. 끝까지 저따위 허술한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태도가 언젠간 저런 사달을 불러 일으킬줄 성재는 알고 있었다. 단지, 예상하던 상대의 성별이 바뀌었을 뿐.

 

웃느라 움푹 파인 창섭의 눈가가 멀찌감치에서도 보였다. 두손바닥을 상대에게 내어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기분나쁘지 않게 거절하려는 모양이었으나 성재의 눈엔 실패로 보일 뿐였다. 그짓은 되레 남자의 심기를 거슬러 강제적인 입맞춤까지 자아냈다. 점점 냉기를 품어가는 스스로의 아우라를 눈치채지 못하던 성재의 입에서 인식지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 잘들 논다.

 

창섭의 두터운 입술이 남자의 더러운 입에 먹히는 것을 목격한 다음부턴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섭의 팔목을 꾹 그러쥐고 어금니를 씹은채 웃고있었다.

 

‘형. 오늘 총회빠지고 어딜가시나 했더니 고작 이런 냄새나는 동네에서 노가리나 까고 있을려고?’

 

물론, 초면에 예의라곤 밥말아먹은 태도를 보인 육성재에게도 약간의 과실은 존재했다. 웃으며 상대를 비하하고 비난하고 업신여기며 비아냥 거리는 태도. 한마디로 이창섭 한정 육성재의 특이습관인 그것이, 이 속이 비좁은 느끼남에겐 아주아주 역효과로 작용했던 것이다. 듣도보도 못한놈에게 밀려난 것이 불쾌해 자켓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가슴을 들이미는 느끼남 앞에서 눈하나도 깜짝않고 똑같이 달려들 기세인 성재를 애써 밀어낸 창섭이 생각해낸 임기응변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실 나 얘랑!’

‘…….’

‘나 요즘에 얘랑 만나고 있거든.’

 

주먹질이 오가기 대략 3초전이란 사실을 남자의 육감으로 캐치해낸 창섭이 고작 할 수있는 전부였다. 정확히 3초뒤 땅을치고 후회하고 싶은 심정으로 스스로를 바꿔놓고 말았지만.

 

‘하하하하하! 그치 성재야.’

 

그 장난같은 해프닝이 시시한 시발점이 되었다.

 

 

 

 

 

“오늘 분위기는 또 왜 이러냐.”

 

과실문을 벌컥 열고 바쁜걸음으로 들어서던 민혁이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창섭과 성재를 번갈아 주시하며 말했다.

 

“싸웠네.”

 

이젠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헝클어진 앞머리나 정리하던 민혁이 날숨을 길게 빼며 호흡을 골랐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다.

 

“너흰 진짜 지루할 틈은 없어서 좋겠다. 변화무쌍해.”

 

별뜻없는 얘길 흘리고 책을 두어권 챙겨 돌아서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다시 가까워졌다.

 

“축구는 누가 하기로 했어?”

“…….”

“농구는.”

“…….”

“계주도. 야, 다른애들 다 적었는데 지금 니네 둘만 여기 펑크나있거든? 도대체 뭔 깡이냐?”

 

웃음을 흘리며 뒷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내리던 창섭의 눈길이 자신에게 와 닿았단걸 성재는 알고 있었지만 끝내 모른척하며 말했다.

 

“전 축구요.”

 

그래? 스마트폰 액정에 손가락을 놀리던 민혁에게 창섭이 이어 말했다.

 

“형 전 그럼 농구 할래요.”

 

그제야 만족스럽단 듯 민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케이. 둘다 이따가 뒤풀이때 보자.”

 

바쁘게 뛰쳐나가는 뒷모습도 균형감이 넘쳤다. 창섭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민혁의 어깨부터 정강이까지를 훑다가 얼른 눈을 거두었다. 민혁이 사라진 과실을 성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웅웅 울려놓았다.

 

“뒤풀이는 무슨. 이놈의 대학은 뭔놈의 풀이가 이렇게 많아.”

 

출범식도 뒤풀이, 개강파티도 뒤풀이, 동기 모임도 뒤풀이, 엠티도 뒤풀이. 말이 풀이지 죄 술 처먹고 누가누가 더 개같은가 도토리 키재기 하는거면서. 체육대회는 안봐도 뻔했다. 잘 받지도 않는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킬걸 생각하니 벌써 역한감이 몰려와 성재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일어섰다. 쾅, 괜히 누군가를 의식하고 과실문을 세게 닫고 나섰더니 금방 끼이익 낡은 문이 뒤따라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짜증나게 온 신경이 등뒤로 쏠렸다. 마치, 무슨 이야기 따위가 들리기라도 기대하는 것처럼.

 

“야 육성재. 이따 올거지?”

“글쎄요.”

“와라.”

“…….”

“어? 꼭 와.”

 

끝내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은 성재에게 더 이상 치대는 하이톤의 목소리는 없었다. 괜시리 뒷목이 가려워 세차게 긁었더니 쓰라림이 남았다. 송골송골 맺혀오는 땀방울도 짜증나고 귓가를 간질이는 듣기싫은 목소리도 짜증나고 온통 세상이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일 투성이었다.

 

 

결국 성재는 전화기를 꺼두고 자취방에 널브러졌다. 술이라면 이번주에 잡힌 약속만해도 벌써 세 개나 됐다. 공짜술도 아니고, 회비까지 걷어 불편하게 선배들 치다꺼리하느니 차라리 미운털 사서 영원한 아싸나 되고 말겠단 오기였다. 어쩌면 멀리 봤을때 후자쪽이 훨씬 지혜로운 일일법도 했다. 올 여름들어 처음 누리는 에어컨 사치와 함께하니 눅눅하던 이불이 이렇게 시원하고 부드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엊그제 보려 받아놓았던 영화한편을 재생시키고 나서 까무룩 잠이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보니 영화는 끝나있고 바깥은 한밤중. 눈비비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다.

 

성재야.

 

하필 받아놓았던 것이 공포영화라서 그랬는지 환청도 들리고 오싹한게 무더위를 넘기기엔 제격인게,

 

‘야, 성재야아.’

 

간드러지는 처녀귀신 목소리면 좀 좋나.

 

‘육성재! 이 멍청아!’

 

좀 좋냐고. 관자놀이를 짚고서 문을 땄더니 휘청거리며 애써 술 안먹은 척 하려 눈에 힘을 주고 비틀비틀 용을 쓰는 창섭이 보인다.

 

“너 말이야. 형이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대답을 말이야, 어? 진짜 이렇게… 어?”

“뭐. 이렇게 뭐.”

 

얼굴대신 삿대질하는 손가락만 휙휙 오가는 코앞에서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 보는것도 이골이난 성재가 창섭의 팔뚝을 움켜쥐고 집안으로 끌었다. 신발끈도 못풀어서 손가락이 자꾸 어긋나는걸 비켜내고 제 손으로 다 벗겨줬다. 이쯤 되니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잘 구분도 가질 않고, 언젠 뭐 구분같은걸 하고 살았나 싶고. 종국엔 어째서 내 천국같은 휴식시간을 방해받나 싶어 짜증이 치밀 지경이 되는것이었다. 이 형하고 있으면 항상 똑같아. 똑같은 패턴. 내가 짜증나거나, 형이 짜증내거나. 금방이라도 내뱉고 싶은 말을 입안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있으려니 비틀거리던 창섭이 감기는 눈을 애써 치켜뜨고 찬찬히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오래는데 왜 안왔어?”

“…….”

“어? 진짜. 나 이제 무시하냐? 대답 또 안할래?”

“눈이나 뜨고 말하지. 여기까진 또 어떻게 기어왔나 몰라.”

“뭐? 기어?”

“…….”

“너 이자식이. 형한테 지금 기어어?”

“…….”

“그래. 내가 쫌 귀엽긴 하지.”

 

생수병을 꺼내와 신경질적으로 볼에다 가져다 댔더니 흠칫 어깨를 떨고는 금방 넙죽 받아드는 꼴이 꼭 강아지 같다. 웃겨야겠단 강박이 늘상 머릿속에 박혀있는 사람. 그래서 제 기분에 상관없이 언제나 남을 즐겁게 하는일에만 신경쓰는 이 창섭. 바보. 성재의 눈엔 창섭이 머리를 굴리는게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도. 항상 생각하는게 눈동자며 눈가, 입술 그리고 손짓 발짓에 전부다 묻어나는데도 본인만 그걸 모른다.

 

“야. 너 진짜 그렇게 똥씹은 표정좀 하지마. 세상에서 젤 못생겼어 육성재.”

“안 웃긴데 어떡해 그럼. 웃겨보든가.”

“새 학긴데, 어? 형이랑 같이 잘 좀 지내보잔 말이야.”

“…….”

“형이 미워도 너무 미워하지 마. 나는 너 진짜 좋거든?”

“은근히 누구 맘대로 눕냐?”

“내 맘….”

“비켜 내 침대야.”

“늦지마라 그리구. 너 내일-”

 

1교시인거 다 알아. 까지 웅얼 거리곤 발라당 누워 금세 색색 고른숨을 내뱉는다.

 

“아주 제 멋대로지 진짜. 이 화상아.”

 

한참을 허리에 손을 얹은채 기가찬 얼굴로 창섭을 내려다보던 성재가, 그제서야 찬물로 목을 축인다. 심심할 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갓 신입이던 지난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네 살이나 많은 형이 먼저 다가와준것도 고마운데, 자존심 세우는 일도 거추장한 허물을 덮는 일도 없었을뿐더러, 철없고 짓궂은 막내뻘 동생의 장난을 궂은 얼굴 한번 안하고 전부 받아주는게 신기했다. 결론적으론 좋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이런걸 독점적이고 스스로만이 누려야할 권리라 착각하고 있는것 같기도 했다.

 

“자냐?”

 

뭘 먹고 어떤 교육을 받고서 자라면 형처럼 그렇게 되는건지 궁금해서 한번은 물은적도 있었다. 그때 창섭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나진 않았다. 그저 깔깔 웃던 개구쟁이같은 웃음만 어렴풋 할 뿐.

 

“형, 자?”

 

성재가 생수병을 내려놓고 침대맡에 가서 손바닥을 저었다. 쿨쿨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애같은 얼굴이 볼만하다.

 

“이창섭- 자냐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온줄도 모르고.

 

성재는 가만히 얼굴을 내려 비스듬히 엎드려 누은 입에 제 입술을 맞춰보았다. 따뜻하고 도톰하고 말랑말랑한 감촉. 가끔 생각했던 느낌하고 비슷했다. 종종 닿아본 여자들하곤 전혀 다른 감각. 그래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도대체가, 무슨짓을 한건지. 술먹고 들어온건 이 인간인데 왜 내가. 한숨을 내쉰 성재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고 몸을 일으켰다. 곪아 터지는 사람 맘도 모르고 태연하게 자는 뽀얀얼굴이 밉다.

 

“뭐. 불만이냐? 요즘 만나는 애랑 이정돈 할 수 있잖아.”

 

기가막힌 합리화. 어쩌면 그날 화가났던 이유도 이것 때문인지 모른다. 일찌감치 품었던 감정은 자신이 먼저이고, 꽤나 소중하게 지녀왔던 것들인데 창섭의 구차한 해명앞에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아서. 스스로가 애써 인내해온 감정의 끝은 결국 형처럼 사과를 해야 할 일이 되는가 싶어서. 그래서 화가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얄미운 바보를 깨우긴 싫어 끝내 조그맣게 속삭이고 있는 제 자신을 미루어봤을때 이미 불리하게 시작된 이 게임을 돌이키긴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마는것이다.

 

 




 

이러고 나서 내일 성재가 창섭이 엉덩이 발로 차서 깨웠으면 좋겠다 난 1교신데 형은 왜 5교시냐고 그러면서 혼자나가기 싫다고 깨워서 질질 끌고 같이 나가랏 히히히 눈퉁퉁 불어가지고 속쓰리다고 찡얼거리면서 결국은 성재한테 끌려나가는 섭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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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떡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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